
<강대의칼럼>한•일간 역사와 문화로 강항문화제가 꽃 피어야
간양록에 의한 우리 선조의 발자취는 마침내 역사와 문화가 되었다.
서론
1. 강항선생의 탄생과 역사적 배경
2. 유학과 주자학, 성리학의 관계
3. 강항선생이 일본에 끼친 영향
본론
1. 강항선생의 유품 및 저서활동
2. 『간양록』은 어떤 책인가?
3. 현재 일본에서의 강항선생
결론
1. 강항문화제의 필요성
2. 강항문화제로 한•일간 발전적 방향
3. 강항문화제의 미래
들어가면서
강항선생의 탄생과 역사적 배경
영광 불갑사를 조금 벗어나면 수은 강항선생(1567~1618)을 배향한 사우인 내산서원이 있다. 1592년 조선은 임진왜란, 1597년은 정유재란으로 온 나라가 전쟁으로 찌들어 있을 무렵이다.
강항선생은 처자식을 잃은 체 일본으로 잡혀가서도 조선 선비의 기질을 굽히지 않고 일본에 주자학의 새 물결을 일으킨다. 강항선생은 詩書畵가 뛰어난 강희맹의 5대손으로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휴가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량 수송과 의병 모집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왜의 수군이 한산도를 거쳐 서해로 밀고 올라 올 때 잡혀 두 형과 가족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강항선생은 대마도로 포로로 끌려가던 중 갖은 학대와 물갈이 등으로 육지를 밟아 보기도 전에 자식들과 처 등 일가족을 처참히 잃고 말았다. 특히 큰조카는 배 멀미와 고열로 심한 갈증을 호소했으나 물 한 모금 주지 않자 갈증을 견디지 못해 바닷물을 마시고 수 분 내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선생이 일본으로 끌려가 2년의 포로생활 동안 강항선생은 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 승려藤原惺窩(후지하라세이카)에게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藤原惺窩(후지하라세이카)는 평소에 강항선생을 향해 말하기를 ‘제가 조선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조상의 음덕이 부족함이요, 중국이나 조선을 가 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藤原惺窩(후지하라세이카)는 일본의 큰 승려로 <도요데미히데요시(풍신수길)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미친 일본의 위대한 승려로 지금도 일본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승려이다.
藤原惺窩(후지하라세이카)는 1593년 여름에는 풍신수길(秀吉)이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축성한 구주(九州)의 비전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에서 명군(明軍)의 강화사절(講和使節)인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 등과의 만남에서는 필담을 교환하기도 했던 인물. >에게 조선 의 주자학 이론과 과거제도 등을 가르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강항선생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적국에 잡혀 갔던 죄인이라 하며 나서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에 힘썼다.
내산서원은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7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워졌는데, 1992년부터 문화재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유학과 주자학, 성리학의 관계
대표적인 학자를 보자면 고려시대 이색, 정몽주, 길재이다. 그리고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도 상당한 학자였다.
주자학의 주요한 수용 계층은 신진 사대부였다.그들은 주자학을 당시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려는 개혁 사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그 당시 주자학과 성리학에 대한 개념이 똑같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들 학문은 크게 봐서는 조선시대에 와서 그것이 발전하고 사상적으로 집대성되었던 것이다.거기에 반해 조선은 숭유억불로 국책을 세워 주자학에 거리를 둔 듯했으나 주자학에 의해 유학의 발전이 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더 요약해서 말하자면 유학은 유가의 학문을 뜻한다. 유가의 학자들이라면 공자, 맹자, 순자를 들 수 있다. 여기에 성리학은 신유학이라고도 불리운다.공자, 맹자, 순자 시대의 유학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하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선진 유학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따라서 성리학은 유학의 발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또 주자학이란 것은 중국의 '주자'라는 사람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집대성하여 재해석한 학설이다.발전의 예를 들자면 조선 후기에는 주자의 성리학으로 각각의 연구가 이루어져 이이의 성리학(일원론적 이기이원론)과 이황의 성리학(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결론적으로 보면 유학에서 성리학으로 발전되고 주자학은 성리학에 포함된다고 보면 된다.
강항선생이 일본에 끼친 영향
강항선생은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일본의 정치가들의 정신적인 참스승이었던 일본 승려들에게 주자학과 유학을 가르치며 미개한 일본의 당시 사회와 문화적인 당시 교육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시켰던 것이다.
또 강항선생은 적중봉소라는 그 누구도 감히 생각을 못할 처지에서 지리와 군사시설 등 왜군의 사정을 고국에 세밀하고도 자세한 사항들을 알려줬던 것이다.
수은 강항선생께서 남긴 유, 무형의 유산은 이처럼 우리나라를 떠나 그 당시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수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여러 분야에 긍정적인 교훈을 심어주고 있다.
세세히 말할 것도 없으나 그 당시 일본의 역사와 문화사상에 영향을 끼친 강항선생은 영광의 자랑이며 한국의 인물이기도 한 선생의 유산은 앞으로도 더욱 잘 보존하고, 또 현재에 맡게 가꾸고 선양해나가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또, 강항선생에 대한 생애와 업적 전반에 대한 고찰과 영광군의 내산서원의 보존 등에 대한 논의가 정, 관계를 떠나 포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뿐 아니라 강항이라는 역사적 문화적인 인물이 갖는 문화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도 영광군과 오즈시의 자매결연을 넘어 올바른 역사재고와 국익차원에서도 심도 깊이 논의해야하는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본론
강항선생의 유품 및 저서활동
수은 강항이라는 이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큰 비중과 가치만큼 현대에 맞게 재조명되고 창조되어야 한다고 많은 연구학자들은 한 때 입을 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차별화된 프로그램과 창작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용하고, 그의 생애와 학문·업적, 영광지역과의 관련성이 담긴 각종 교육자료집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또한 영광에서 강항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원화하려면 가장 먼저 영광에 관련된 여러 부분의 자료들을 연차적으로 조사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가 매년 축제 기간과 심포지엄, 포럼을 통하여 홍보되고, 그 결과가 학술지로 발간할 수 있도록 체계화한다면 그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특히, 우리 고장엔 불갑면 내산서원을 비롯해 강항의 생애와 관련한 유적이 곳곳에 분포돼 있다. 연구자와 교육자, 후손들과 역사와 문화 전문가가 함께 모여 연계하고, 각기 적절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이런 유적 현장에서 여러 장르의 종합창작예술로 재현시킨다면, 과거의 역사와 문화가 현재와 미래의 문화로,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쉽게 접하고 즐기면서 배우는 문화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차대한 차원에서 강항선생의 정신을 되살리려고 하는데 몇년전 사당인 내산서원 경장각에서 전남도지정 유형문화재 213호인 강감회요 목판(숙종 28년 제작) 380점이 사라진 것이다. 유물과 문화제를 대표할 만한 글을 언론과 매스컴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나라 전지역과 일본 등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2.『간양록』은 어떤 책인가?
간양록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다
『간양록(看羊錄)』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던 조선의 포로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인 강항(姜沆)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글이다.
그 시기는 선조 30년(1597) 9월에서 33년(1600) 5월까지이다. 현전하는 『간양록』의 판본은 필사본, 목판본이 있는데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간양록』은 「적중봉소(賊中封疏)」 - 적중에서 올리는 상소 -,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 적중에서 듣고 본 것의 기록 -, 「섭란사적(涉亂事迹)」 - 난리를 겪은 사적 -, 「고부인격(告?人檄)」 - 포로인들에게 고하는 격문 -,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 승정원에 올리는 계사 - 등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간양록』의 역사성과 문학성
『간양록』은 실기문학이다. 실기문학은 실존인물이 전쟁이나 난(亂), 사회적 의미가 있는 역사적 현장에서 직접 겪은 체험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와 같은 사실지향적인 서술태도를 보이면서도 이성보다도 감성에 호소하는 체험중심의 문학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글은 강항선생이 1598년 새해를 맞이하여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쓴 시.
봄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돌아갈 생각 배나 많아진다오.
어느 때나 우리 집 담장 밑에
손수 심은 꽃 다시 볼거나.
금장(錦帳)의 명부(名部)가 일본에 떨어지니
머나 먼 천리길 바람편에 맡겼다오.
대궐의 소식은 큰 파도 넘어 아득한데
학발(鶴髮)의 모습은 꿈 속 희미하도다.
두 눈은 일월 보기 부끄러운데
일편단심 옛 조정만 기억되누나.
강남이라 방초(芳草)시절 뭇 꾀꼬리 요란한데
우공(寓公)을 돌려보낼 빠른 배 있을는지.
3. 현재 일본에서의 강항선생
일본에 성리학을 전수한 공으로 오즈시에 강항 선생의 유물관과 현창비가 세워져 있으며 영광군과 매년 교류를 하고 있다.
『간양록』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당시 일본 내부의 정세와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한 점에 있고, 문학으로서 가치는 포로체험이라는 사적 체험을 통해 당시의 수많은 조선 포로의 애환을 대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주자학과 유학이 일본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조선 문명을 떨쳤다는 의미를 갖는다.
지금 일본의 오즈시, 그곳에선 강항을 연구하는 모임이 있고, 또 그를 기리는 현창비까지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즈시의 초등학교 부교재에도 강항이 소개되어 있다.
<강항선생 시 한 수>
해동이 여기던가 천리 밖 아득한 곳,
바람 편에 보내는 소식 아는가 모르는가?
봉성 옛터의 소식은 아득하고
꿈도 물결에 쌓여 오도가도 못하네
두 눈 씻고 보라 일월이 아닐 거야
한마음 기러기 뜻을 사긴지 오래다
강남에 꾀꼬리 울고 꽃은 피어 만발한 곳
날으는 배를 타면 돌아와 그대에게 묵으리
<강항선생현창비 뒷면에 새겨진 詩 - 오즈시민회관>
결론
1. 강항문화제의 필요성
- 1980년대 영광이 나은 역사학자 이을호박사(당시 강항선생축제추진위원장, 안진오전대철학과교수, 이영희제일사학자 등이 추진위원으로 구성됨)에 의해 강항선생의 간양록이 빛을 보고 1980년대 MBC방송국의 드라마로 탄생되며 강항선생의 업적이 이어지는 듯했으나 일부 세력에 의해 소멸되었다.
- 2001년 3월 30일 문화관광부 선정 3월의 인물 '수은 강항 선생'의 문화심포지움이 영광군청 대회실에서 열렸다.
- 2002년 11월 11일 일본 오즈시장 일행 8명이 영광군을 공식 방문. 영광군청에서 김봉열군수 및 관계자와 접견자리에서 마스다 요이치 오즈시장은 2004년 9월에 완공 예정인 수은 강항선생 억류지의 오즈성 복원 행사에 영광군수가 참석해 자리를 빛내 줄 것을 요청했다. 2004년경 자매결연을 맺고자 했다
- 2009년 4월 11~12일 불갑사와 내산서원일원에서 영광청년회의소 주최로 강항문화제가 처음 개최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일과성에 끝나다.
- 2010년 4월 30일 영광읍 한전문화회관에서 강항선생심포지움을 개최했다. 목포대, 원광대, 전남대, 공주대, 순천대 등 대학의 사학자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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