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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1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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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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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睡隠 姜沆)선생
수은 강항(睡隠 姜沆)(1567∼1618년)선생은 전남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에서 박사공 강계용선생을 시조로 14세손이며 사숙재 강희맹선생의 5대손으로 테어났다.
선생은 3세부터 백형(伯兄) 저어당 해로부터 사서오경을 배우고 익혀 7세에 맹자정비 일화와 8세에 강목촌 일화를 드높일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벼슬길에 올라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영광 임진 수성사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왜의 수군이 한산도를 거쳐 서해로 돌아 들어오자 선생은 가족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두 형(준과 환)과 함께 왜군에 피로(被虜) 되었다.
선생은 일본에서 시코쿠(四國) 지방의 오즈(大津)성에 약 1년, 교토의 후시미(伏見)성에 약 1년 8개월 머물게 된다.
이 포로 길을 우리는 후계세대가 한 맺힌 역사의 현장을 잊지 않도록 강항로드(ROAD)길로 개발하고 ‘강항문화제’에서 체험학습에 활용하기로 계획하고 적극 나서고 있다.
왜국의 학승(學僧) 순수좌(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는 당시 조선에서 국가의 통치, 지배, 경영이념이자 최고의 선비문화로 르네쌍스를 구가(謳歌)하고 있음을 몹시 동경하며 이러한 경지에 오른 조선의 유교(儒敎)에 갈망(渴望)하였다.
때마침 지성(至聖)의 반열(班列)에 오른 수은 강항선생을 만나자 마자 필담(筆談)을 통해 고매한 학덕(學德)을 지닌 선비임을 순식간에 알아보고서 읍소(泣訴)하며 간절히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연을 청했다.
이에 선생이 깊은 고민 끝에 허락을 해 제자로서 예법을 갖추고 사서오경과 조선의 유학 이론과 과거제도, 상례 등을 배웠고, 일본에새 유학뿐 아니라 그가 동경(憧憬)하는 심의(深衣) 선비한복을 한 땀 한 땀 짓는 방법까지도 터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심의(深衣)인 선비한복을 후계세대에 도입해 의복을 단정히 착용함으로써 자세가 달라지고 인성교육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어린이 선비한복모델을 선발해 한 · 일 간의 역사, 문화교류에 적극 앞장서고자 하는 것이다.)
마침내 순수좌(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를 불러 무(武)에서 문(文)으로 강독(講讀)함으로써 일본 최고의 막부를 무장해제(武裝解除)를 시키는 일생 일대의 큰 사건이 되고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어 마침내 왜국에서는 근대시대로 나아가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맞이하게 된다.
순수좌(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의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을 통해 막부(幕府)에서 근대 일본의 주춧돌 역할을 함으로 마침내 수은 강항(睡隠 姜沆)선생은 ‘일본 유교의 비조’가 되었다.
수은 강항(睡隠 姜沆)선생은 왜국에 억류되어서도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발문했고, 『곡례전경』(曲禮全經),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일본에 남겨겼다.
이는 역사적으로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사실로 일본인들은 '일본 근대화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현재 일본 국립공문서관 내각 문고에 '강핟휘초'가 소장되어 있음을 지난 2019년 수은강항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일본에 건너가 확인하였고 그들은 수은 강항(睡隠 姜沆)이 ‘일본 유교의 비조’ 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간양록>
시원한 국문의 글
조선의 선비가 쓴 ‘포로 실기문학’의 백미.『간양록』은 강항이 정유재란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피난 중에 아비와 헤어졌을 뿐 아니라 자식들을 잃은 사연, ‘적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 하며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적에게 구출되어 낯선 일본 땅까지 끌려간 일, 몇 번이나 탈출을 도모하다가 붙잡힌 일,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여러 포로들의 삶 등이 이 책에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지은이 강항은 책 이름을 '건차록'이라 하였는데, 후대에 그의 문인과 제자들이 이 책을 펴내면서 '간양록'이라고 바꾸었다. 강항(1562-1618)은 형조좌랑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군량보급을 하기도 하고, 의병도 일으켰으나 왜놈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1600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하여 우리의 국익에 보탬이 될 만한 내용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왜놈들은 허풍이 심한데, '태장로'라는 자는 임진왜란 발생시 "명나라는 일본에 조공을 바치러 오려던 참이었고, 조선은 못된 짓을 하였기에 군사를 보내어 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안국사서당'이라는 자는 조선의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을 거의 제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조선을 업신여기고 비웃는 자이다.
왜놈들은 웬 칼을 두 자루씩이나 차고 다니는데, 긴 것 하나와 짧은 것 하나다. 장군이나 졸개나 마찬가지다. 자나 깨나 차고만 지내니 통틀어 싸움나라 구석인것이 분명하다. 동서남북으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니 거저 힘센 놈이 장떡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면 못 당할 일을 당하기 전에 자결하며, 두 사람이 싸우다가 상대를 죽여 목을 베고 배를 갈라 헤쳐 버리면, 모두들 "사내대장부로군!"이라며 그 사람을 칭송하며, 그 자손을 보면 "저 애가 죽음을 무릅쓰고 덤빈 그 사람의 자식이야!"하며 서로 사위를 삼고 며느리를 삼으려 드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왜놈들은 어떠한 재주, 어떠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천하제일을 내세운다. 천하제일이란 명장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이면 제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천금을 아끼지 않고 덤벼든다. 제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명장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면 물건 축에도 못낀다. 천하제일의 명패가 붙은 것이면, 사람들마다 "좋긴 좋은데" 알은채, 별것인 채하면서 큰 돈을 내던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들의 풍습이 한번 그렇게 젖은 구석이라 속내를 아는 이는 속으로 비웃으나 어떻게 막아낼 도리도 없다.
조선사람들은 매양 왜놈들이 점이나 부적에 능하고, 천문지리, 관상등에도 능하다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이 쓰는 부적이란 보지도 못한 것이요, 점도 생년월일을 주역괘에다 맞춰 베껴주는 것이다. 손님이 복채를 주면서 길흉이 어떠한가를 물으면 "그 안에 다 적혀있습니다"할 뿐이고, 손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네, 그런가요?"라고 하며 돌아간다. 그리고는 천하제일이 베껴준 글이라고 애지중지한다.
소위 우두머리라는 자들도 문자를 아는 놈은 한 놈도 없고, 그들이 쓰는 글이란 조선의 이두와 비슷한 글자이며, 그 글자의 뜻을 물어보면 "모르지요. 무슨 뜻인지"라고 널름 대답한다. 병서가 있기는 하나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뿐 반 줄도 읽는 놈이 없다. 놈들이 싸울때 그저 어떻게든지 이기기만 하면 되었지 병법과 무관하다.
이는 우리들 포로들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이므로 틀림이 없다.
중(스님)만은 칼을 차지 않는다. 이들은 의술을 배우거나 장사를 하거나 점을 치거나 하며 다 처자를 두고,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으며, 저잣거리에 그대로 섞여 살림을 한다.
또 다른 한 패의 중 부류가 있다. 그들은 처자를 거느리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는다. 대숲속에 숨어 세상사와는 떨어져 지낸다. 아마도 왜놈들 열 가운데 네뎃은 중대가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밤낮 죽이고 찢고 하는 싸움이 싫고, 뼈 빠지게 부림을 당하는 일꾼이 되기 싫어서 제 한 몸이나 가꾸다가 죽자는 데서 모두 중이 되기 때문이다.
왜놈들은 귀신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복 받겠다는 무리들이 쌀이며 돈을 짊어지고 저자로 모여들 듯이 쏟아져 나온다. 이 점 가토 기요마사도 마찬가지인데, 지위고하를 막론한다. 그들이 하는 짓이란 아주 먹보, 놈팽이 같은 짓을 예사로 하기 때문에 그게 어느 귀신이 되었든지 간에 복만 주면 좋다는 식으로 덤벼든다. 한 번 미치면 다시 헤어날 줄 모르는 그들이니 섬 속에 묻힌 개가죽 패들의 놀음이란 대개 이런 정도다.
왜놈들은 존경하고 신뢰하던 사람이 죽으며 반드시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낸다. 제 아비나 어미의 죽은 날은 대수롭지 않게 지내지만, 신인(神人)으로 모신 이의 기일에는 부정한 것을 꺼린다고 하여 생선이나 고기를 절대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기에 명절때나 좋은날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깨끗한 예복에 정결한 몸차림으로 이 길목 저 길목에서 쏟아져 나온다. 신사 사당 앞뜰에 늘어선 군중으로 빽빽이 들어차는데, 돈을 던져 그 값어치의 복을 빈다.
왜놈들은 '크다', '위대하다' 이런 것을 좋아하고, "그건 내가 한 거야!"하며 뽐내기를 좋아한다. 상선을 타고 와서 물품을 파는 외국인이 들어오면 으레 "외국사신이 들어왔어!"라고 호들갑을 떤다. 인도는 놈들 땅에서는 매우 먼 곳이지만 놈들의 왕래가 잦다. 나귀, 노새, 낙타, 코끼리, 공작, 앵무새 따위가 자주 들어온다. 그들의 저잣거리는 중국 물건이 아니면 남양에서 나는 물자가 그득하다.
대마도 여자들은 대부분 조선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지내며, 남자들은 거의 조선말에 익숙하다. 그들은 왜국을 가리켜 언제나 '일본'이라 부르고 조선을 가리켜 언제나 '조선'이라 부르며 그들 스스로 일본으로 자처하지는 않는다.
평소에 조선에서 받는 이익이 일본에서보다 많은 까닭에 조선을 떠받드는 마음이 일본에 붙자는 마음보다 더 많다. 그러기에 길이 멀고 풍랑이 거세다는 핑계로 조선을 건드릴 수 없다고 일러 오더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자 대마도주는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벌벌 떨면서 조선을 팔아 도요토미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침공의 선봉이 되니, 도요토미는 대마도주에게 큰 상을 내리고, 대마도 놈들도 쌀밥을 얻어먹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조선에서 주는 하사미을 받아먹고 살았을 뿐인데. 대마도 놈들은 아주 간사하여 조선 내정을 모르는 것이 없다. 조선이 강하면 조선에 달라붙고, 왜놈들이 강해지면 조선을 팔고 농락하여 침략의 앞잡이가 되니, 그 흉측망측한 꾀부림이란! 향후 조선이 혼란스러워지면 또다시 이놈들에게 속아 넘어가고야 말것이다.
이순신은 물목을 막자던 우리의 수로대장이었는데, 그의 잘못이 없는데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잡아 올려 죄인으로 만들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한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본군포로가 된 조선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가찬다.
"정유년 7월15일의 일이다. 왜장이 졸개를 보내 조선병선을 살펴본 바, 배마다 모조리 졸고 있거나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공포를 몇 방 쏘니, 닻을 끊는다, 노를 젖는다 하여 우왕좌왕하는 꼴이란. 그만 왜병이 냅다 치는 판에 한산목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군이 여세를 몰아 서해를 타고 올라가려 하였다. 그러나 전라우수영 목에서 이순신이 버티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원균의 상식없는 통솔력이 어떠한지, 그리고 이순신이 적은 수로 많은 적들을 막아 내던 그런 역량은 대단한 것이다.
조선을 침입한 왜장의 우두머리는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인데, 두사람은 예전부터 사이가 않좋았으며, 나날이 사이가 나빠졌다. 두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런데 이 두 놈들이 이렇듯 으르렁대고 있는 판에 조선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틈을 타서 저희들끼리 싸우도록 만들지 못했으니, 조선신하들의 재주는 다 어디로 갔는지! 장수들의 무능함이 이만저만하지 않다.
왜군중 농민출신의 군복은 흔히 범가죽이나 닭의 깃 등속으로 치장하고, 초라니패 같은 것을 만들어 말머리에 씌우거나 낮짝에다 쓰고선 어리둥절하게 속여 내자는 수작을 한다. 나는 이런 꼴을 보고서 하도 우스워서 "저게 뭐야? 별놈들도 다 보겠네" 하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통에 뺑소니친 조선군졸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 보면
"왠 호랑이와 표범, 도깨비 패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지 않나!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지!"라고 하니 기가 막힌다. 아니, 죽은 범의 가죽이나 죽은 닭의 꼬리가 사람을 잡는 법도 있으며, 나무로 만든 탈이나 나무로 만든 말머리가 사람을 잡는 법도 있는가 말이다.
왜놈들이란 원래 키도 작고 힘도 그리 보잘것없는 족속이다. 조선 장정들과 씨름을 붙여 보면 하나같이 때려눕혀진다.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놈이 있다 한들 얼마나 나 많겠는가.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패하다니! 조선의 정예 군졸들이 텅 하고 쏘아 대었던 그 활은 다 어디다 두었는지! 죽자 하고 싸우면 그들에게 못 이길 바 없건만
무술년 여름에 조선에서 철수한 왜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칼은 겨우 몇 발자국 안에서밖에 맥을 못 쓰는데 조선활은 수백 보 밖까지 내뿜어 오지 않겠나. 조선 군사들이 기를 쓰고 덤비면 해 볼 재주가 없을 것 같아."
나의 귀로 나의 눈으로 듣고 본 것이 이러하다.
조선은 왜군의 귀순병들을 무조건 죽이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군의 귀순병들을 따뜻하게 대접하고, 적진 가운데로 다시 보내 그들의 동료들을 꾀어내도록 공작을 한다면 하루에 몇백명씩 귀순할 것이다. 그렇게 잔털 뽑아내듯 하면 적세는 차츰 부서질 것이다. 되놈들의 손으로 되놈들을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 중국의 제1전략이다. 그런데 제풀에 기어드는 귀순병들을 잡아 죽여 "잘한다. 잘한다."하는 왜놈들의 비웃음을 사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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