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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1-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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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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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해질 무렵의 낙조의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만남을 간직한 게 동쪽마을의 동해라면 서해는 당연히 이별, 헤어짐에 아쉬워하는 마음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릴 적 늘 동산에 올라 놀다가 보면 어느새 해는 수평선에 걸려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함께 놀던 친구들과 얼마나 아쉬워하며 늘 반복적인 놀이에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는지 모른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갯벌이 깊어 천혜의 온갖 수산물로 넘쳐나 뛰어난 미각을 갖게 한 정말 아름다운 내 고향이다.
그 중에 이젠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버린 원불교는 우리 고장 백수 길용리 출신 박중빈이 1916년 개창한 한국 특유의 민족종교이며 세계종교이다.
원불교에서 일컫는 성지는 박중빈이 탄생하여 개교한 영광 백수의 영산성지이자 개법성지인 우리 고장 영광은 박중빈의 생가,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대각을 이룬 노루목,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이룬 정관평 방언답 등이 있어 성지 순례를 위해 전국의 교도뿐 아니라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박중빈은 1891년에 백수 길용리 영촌 마을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7세 무렵 무지개의 신기루를 잡으려고 동산을 몇 개를 뛰어 넘고 끝내는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보며 인생무상과 자연의 풀리지 않는 법칙의 자연현상과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의문을 품고 도를 구하며 고행을 하던 중, 23세 되던 해 길룡리 노루목 당산 옆 움막에 들어가 3년간의 고행으로 온 몸에 부스럼이 생기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구도 정진 끝에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根源)임’을 깨닫고 20년에 이르는 종교적 방황을 중지했다. 이때가 1916년으로, 원불교는 이 해를 원기(圓紀)로 삼고 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그가 16세 이후 도사를 찾아 헤매다가 참선구도 3년 만에 대각을 이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백수와 법성을 중심으로 박중빈의 청년시절에 같이 교류했던 노인들의 말을 빌면 박 중빈 거사는 민중치료술이나 한의학에도 밝았으며 엉뚱하리. 만큼 일반적인 사람과 모든 면에서 달랐고, 어릴 적부터 여러 유사종교를 접해가며 종교적 진리를 깨치려고 방황하다가 결국 불교에서 바른 길을 찾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이야기가 장황해졌지만 우리 고장의 원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 종교의 시대적인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민족도 숱한 신앙이 존재했는데 일반적으로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중심의 태양숭배, 동물숭배와 같은 자연신앙의 형태를 띤 종교를 가져왔고 이것이 고래의 민간신앙이다. 그 후 대륙과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불교가 전래되고 유교, 도교가 들어와 서로 공존하고 배척도 하는 가운데 각각 당대의 종교계를 지배했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세상에 태어난 1891년도 바로 이 시기이다. 당시는 일찍이 없었던 격동의 시기이고 일대 전환의 시대였다.
당시의 시대적 위기를 두고 박중빈은 후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설파했다.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해야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해지고 물질의 세력이 날로 융성하여 정신을 지배하므로 이처럼 사람이 도리어 물질의 노예가 되니 어찌 파란고해가 없겠는가?>라 개탄하면서 <이제부터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설법은 결국 원불교 개교의 동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원불교 『교리전서』 총편 제 1장에 나오는 핵심글귀가 된다.
당시 한반도의 종교계는 유불선 3교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는데 산중에 칩거한 불교, 허례와 공론으로 본질이 훼손된 유교가 그렇듯 당대의 종교들은 그 시대상에 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고스란히 내보이며 일없는 이들의 양생 술로 그림자만 남아 있게 되었다. 천주교도 숱한 박해를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군주체제의 동학은 더더욱 갖은 어려움 끝에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중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써 새로운 성자에 의 한 새 사상, 새 종교를 더욱 기다리게 된다. 이 때 박중빈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각 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주창하고 미신타파, 문맹퇴치, 저축조합 운동을 통해 일제의 침탈로 인한 혼란한 시국 속에서 희미해가는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땅에 떨어진 인륜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는 추종자들과 간척사업에 들어갔다. 2년 만에 길이 1,632M의 둑을 쌓아 바다를 막고 2만 6천여 평의 농토를 만들었다.
박중빈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 같은 대역사(大役事)에 성공하자 종교적 관심으로 모였던 당초의 뜻처럼 불교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종교의 체계화 작업에 착수했다.
1935년 8개지부를 설치하고 8백여 회원을 확보한 박 중빈거사는『조선불교혁신론』이란 책을 내고 「불교 교리는 출가(出家) 수행자(修行者) 본위에서 재가(在家) 대중(大衆) 본위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인도불교를 한국적 불교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란 개혁론을 바탕으로 교리를 한글화하고 무신적(巫神的)인 요소도 배제시켰다. 박중빈은 이 같은 불교의 한국화 작업 도중 1943년 53세의 나이로 타계하고 그의 대를 이은
송규 정산종사 때 원불교란 교명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영광에서 발원한 원불교는 그때부터 생활종교, 대중의 종교를 높이 외치며 민족과 인류의 희망이요, 미래를 여는 정신개벽의 종교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1971년 교도들은 박중빈이 수도했던 대각지인 길룡리 노루목에 「만고일월(萬古日月)」이란 기념비를 세웠고 이 일대를 성역화하고 있다. 박중빈은 원불교에서 대종사(大宗師)라 부르는데 기념비문은 ‘그의 가르침이 해(日)와 달(月)처럼 영원(萬古)히 빛나리라’는 뜻과 많은 뜻이 있는데 돌고 돌아 원을 이루 듯 처음과 끝이 수 없이 반복된다, 하루가 있으면 쌓아가 한 달이 된다, 해가 있으면 달이 존재한다는 등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한다.
내 고향 소개가 쑥뜸요법과는 관계없이 너무 길었으나 근세의 어려웠던 우리 시대를 음미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기회는 이때다 싶어 장황히 설명해 봤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 내 부모님에 대해 말을 해 볼까 한다.
전남 영광군 백수읍 명산마을에서 별제공 영자 구 할아버지께서는 당대에 전국 바둑계의 고수이셨고 사서삼경을 소 시절에 통달하셨고 풍수지리 및 동의보감 뿐 아니라 고대의서 「방약합편」중국의 의학서, 황제내경 등을 두루 탐닉하셨다.
이후 쑥뜸을 바둑이나 창 또는 시조를 하시면서도 습관처럼 평상시에도 아주 즐기셨으며 동네사람들의 치료에 능하셔서 주변 사람에게 쑥뜸을 자랑삼아 시술하여 주시기도 하셨다.
1920년경 그 때만 해도 신통한 약도 없고 미신이나 샤머니즘이 팽배할 정도로 사회가 피폐해져 조금만 집에 우환이 있어도 굿을 해 대던 때라고 어머님께선 말씀하신다. 각 집마다 부엌에 깨끗한 물을 떠 놓고 조앙 신을 모시기도 하고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가 대수롭지 않을 때였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바둑을 두시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시자 할머니께서는 바둑판의 어떤 기운 때문이라고 믿으시고 바둑판을 통째로 소여물 가마솥에 끓여 그걸 마시게 하셨을 정도였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그걸 뿌리치고 백회혈과 용천혈자리에 쑥뜸을 하여 그 당시 건강을 지키셨다고 전한다.
그런 집안 내력으로 인해 아버지(이젠 이미 고인이 되셔서 더 좋은 세상에서 영면하고 계시겠지만)백산공 덕자 수 선친께서는 영광군 백수평야지대인 자연부락에 정착하셔서 정미소를 운영하셨고, 나라 정씨 정자 숙 어머니와 함께 쑥을 이용한 음식이며 쑥을 이용한 여러 가지 방법에 익숙하셨다. 지금도 전남 영광군하면 모시잎 떡으로 유명하지만 가래떡, 찰떡, 쑥떡을 포함한 모싯잎 떡의 대가는 나의 어머니셨다.
얼마나 떡을 많이 하셨든지 4대 명절 무렵이면 명절 앞두고 부터는 철야로 떡을 하셨다. 가루를 내 부엌에는 언제나 커다란 떡을 만드는 대형 시루가 얹어 있었고 쌀가루, 밀가루, 찹쌀가루를 내는 분쇄기계가 3대나 준비되어 있었다. 중추절 때는 시루떡, 쑥떡, 송편을 빚기 위해 떡가루를 찧느라고 정신없이 철야를 하셨고 설날 무렵이면 가래떡, 찰떡, 절편떡 등 여러 모양의 떡들을 동네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서 까지 그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늘 문정성시를 이루었다.
이후 1980년 초 백산정미소를 정리하시고 광주로 올라와 생활하시면서 2000년 봄부터 아버지께서는 위암의 재발로 한방병원과 광주기독병원에서 병마와 치열한 한 판 싸움을 하고 계셨고 어머니 역시 잔병으로 인해 동아병원, 전남대 병원과 삼성병원에서 음식을 잘 소화해 내지도 못하고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왼쪽다리 마저 고관절수술 후유증으로 고생이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2003년 9월 23일,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2003년 10월 3일 따라 돌아가시기 전까지 쑥뜸의 효과는 지대하였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한방병원에서 치료용으로 준 대통 쑥의 매력에 푹 빠지셔서 대통 쑥이 비싼 나머지 리필해서 사용하면 “원래 한방병원에서 준 대통 쑥이 좋더라”하시며 한사코 리필하지 못하게 하시며 말년에 대통 쑥을 좋아하셨다.
또 자식이 끈기 있게 알 뜸을 한 걸 늘 염두에 두신 듯 연기가 방안 가득차고 매꿰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별로 효과가 없는 듯 흘러가도 당신께서는 아무말씀이 없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그나마 연기와 냄새가 덜 나는 게 대통 쑥뜸 외에 더 좋은 쑥뜸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쑥을 사랑하는 가족들 영향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병수발을 하면서 까지 미리 준비된 쑥뜸기구로 으레 마땅히 알아서 쑥뜸을 자주 떠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62세에 광주기독병원에서 위암수술을 받으시고 79세에 영면하셨으니 실로 당신께서도 몸 관리를 끔찍이도 아끼시며 하셨고 쑥뜸이 암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고 쑥뜸의 믿음이 아버지께 평온함을 선물하였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가슴부위에 쑥뜸을 해 드리면 가만히 눈감고 명상에 잠기시면서 쑥 냄새를 음미하셨기 때문이다.
또, 자식을 위해 온갖 약을 수소문하시다가 더 이상 좋다는 것이 없다는 걸 아시고 나서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이 즐기셨던 쑥뜸임에도 불구하고 행여 잘못될까봐 뭇사람들에게 사방팔방에 또 물어 보고서야 아들에게 권하여 난치병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복막염후유증인 배꼽 탯자리에서 나오는 고름을 멈추게 하셨으니 이 또한 얼마나 쑥뜸에 대한 효능을 굳게 믿고 계셨던 것인지 모른다.
당신께서는 매일같이 배꼽 주변에 쑥뜸 하는 걸 감시하다시피 하셨고 아들이 회의적으로 말할 때도 용기를 북돋아 주셨으니 쑥뜸에 대한 믿음이 정말 대단하셨던 것 같다.
복부쑥뜸의 불편한 점이 없었고 자식들이나 보호자들이 선친이상의 신념을 갖고 더 노력했더라면 좀 더 오래 살지 않으셨을까 하는 마음이 자식입장에서 늘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병원에서는 위암수술을 해도 5년 또는 10년이라고 말했는데도 훨씬 인생을 풍미하셨다고 자위해 본다.
말년에 그토록 좋아하시던 술과 담배를 아예 안 하셨으니 차라리 병원에서 투여한 항암약과 주사를 거부하고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좋은 쑥뜸기로 복부쑥뜸을 매일같이 즐기셨더라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분명한건 지금도 이 세상에 계시면서 더 인생을 즐기셨을 것이다.
지금도 후회스러운 것은 병원 항암 약을 드시면서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셨고 무기력증에 빠져서 스스로 생을 포기하신 것 같아 지금도 그 부분에서 생각해보면 영기분이 개운치 않고 죄스러울 뿐이다.
식사를 잘 못하시고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셨으니 쑥뜸이상 더 좋은 게 없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다.
또,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말년에 광주공원에 자주 다니셨다. 어쩌다 광주공원에 들려 보면 광주공원이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로 붐빈다. 아차 싶은 게 광주공원이 소외받는 노인들의 집합소인줄 몰랐다. 칠남매를 두신 아버지이신데도 고독과 외로움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었다. 살아생전에 좀 더 유심히 부모의 어둠을, 그늘을 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뼈아픈 후회와 안타까움이 있다.
한편, 어머니께서는 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당신의 인내로 넘긴 참을성이 대단하시며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정을 주시는 바다와 같은 분이셨다.
정말 생전에 모습이 고와서 친구들이 큰 누님 아니냐며 놀릴 정도였고,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우셔서 한 마리 푸른 학이라 하여 靑鶴이라는 호를 갖고 계신다.
어머니께서는 부인병부터 시작하여 허리, 어깨, 팔, 다리, 위, 장, 심장질환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억척스럽게 정미업에 떡, 고추 방앗간 까지 도맡아 운영하시고 50세 초반에 원자력치료로 심신이 이미 황폐화해진 상태에서도 지겹도록 병마와 갖은 싸움을 하시며 칠남매를 키우며 살아오셨다.
팔남매에서 큰 누이를 3살 때 그 때 유행한 전염병에 잃어버리고 나서는 7남매를 다 키우시고 골골 팔십이라지만 병마와 힘들게 싸우시고는 마침내 76세의 비교적 아까운 노년시절에 세월의 인생을 접으셨다.
그렇지만 지금도 전남대 병원 근처를 가노라면 휠체어에 아침 햇살을 얘기하고 저녁놀을 말씀드리며 완쾌를 빌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년전의 기억과 추억으로만 남는다.
온 아파트방안이 매캐할 때까지 어머니께서 쑥뜸에 지치시겠다는 형제남매의 만류의 말도 뒤로 하고 마구 쑥뜸을 해 드렸다.
또, 전대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담당의사 선생님과 병실에 함께 입원중인 환자와 보호자를 비롯해 모든 분들께 양해를 얻고 대 놓고 쑥뜸을 해 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냄새와 연기를 마다하지 않고 정겹게 봐 주신 그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어머니는 자식이 해 주는 쑥뜸에 불편해도 늘 말없이 묵묵히 누워 계셨다. 어쩌면 좋다 싫다 말씀을 하실 것 같았지만 아들이 하는 쑥뜸을 믿으셔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흉터가 생기고 물집이 생겨도 싫다는 표정도 없이 늘 쑥뜸을 해 드렸고 정성을 다 했다.
물집이 생기면 곧 아물거라며 실과 바늘을 이용해 물을 빼드렸고 상처가 생기면 곧 나으실 거라고 흉터가 남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 드리듯 자주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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