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은 강항선생 기념사업회 :::
 
작성일 : 09-12-07 00:09
원불교이야기
 글쓴이 : 강의나라
 
우리 고장의 원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 종교의 시대적인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민족도 숱한 신앙이 존재했는데 일반적으로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중심의 태양숭배, 동물숭배와 같은 자연신앙의 형태를 띤 종교를 가져왔고 이것이 고래의 민간신앙이다.  그 후 대륙과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불교가 전래되고 유교, 도교가 들어와 서로 공존하고 배척도 하는 가운데 각각 당대의 종교계를 지배했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세상에 태어난 1891년도 바로 이 시기이다. 당시는 일찍이 없었던 격동의 시기이고 일대 전환의 시대였다.

당시의 시대적 위기를 두고 박중빈은 후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설파했다.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해야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해지고 물질의 세력이 날로 융성하여 정신을 지배하므로 이처럼 사람이 도리어 물질의 노예가 되니 어찌 파란고해가 없겠는가?>라 개탄하면서 <이제부터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설법은 결국 원불교 개교의 동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원불교 『교리전서』 총편 제 1장에 나오는 핵심글귀가 된다.

당시 한반도의 종교계는 유불선 3교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는데 산중에 칩거한 불교, 허례와 공론으로 본질이 훼손된 유교가 그렇듯 당대의 종교들은 그  시대상에 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고스란히 내보이며 일없는 이들의 양생 술로 그림자만 남아 있게 되었다. 천주교도 숱한 박해를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군주체제의 동학은 더더욱 갖은 어려움 끝에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중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써 새로운 성자에 의 한 새 사상, 새 종교를 더욱 기다리게 된다. 이 때 박중빈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각 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주창하고 미신타파, 문맹퇴치, 저축조합 운동을 통해 일제의 침탈로 인한 혼란한 시국 속에서 희미해가는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땅에 떨어진 인륜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는 추종자들과 간척사업에 들어갔다. 2년 만에 길이 1,632M의 둑을 쌓아 바다를 막고 2만 6천여 평의 농토를 만들었다.
박중빈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 같은 대역사(大役事)에 성공하자 종교적 관심으로 모였던 당초의 뜻처럼 불교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종교의 체계화 작업에 착수했다.

1935년 8개지부를 설치하고 8백여 회원을 확보한 박 중빈거사는『조선불교혁신론』이란 책을 내고 「불교 교리는 출가(出家) 수행자(修行者) 본위에서 재가(在家) 대중(大衆) 본위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인도불교를 한국적 불교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란 개혁론을 바탕으로 교리를 한글화하고 무신적(巫神的)인 요소도 배제시켰다. 박중빈은 이 같은 불교의 한국화 작업 도중 1943년 53세의 나이로 타계하고 그의 대를 이은
송규 정산종사 때 원불교란 교명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영광에서 발원한 원불교는 그때부터 생활종교, 대중의 종교를 높이 외치며 민족과 인류의 희망이요, 미래를 여는 정신개벽의 종교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1971년 교도들은 박중빈이 수도했던 대각지인 길룡리 노루목에 「만고일월(萬古日月)」이란 기념비를 세웠고 이 일대를 성역화하고 있다. 박중빈은 원불교에서 대종사(大宗師)라 부르는데 기념비문은 ‘그의 가르침이 해(日)와 달(月)처럼 영원(萬古)히 빛나리라’는 뜻과 많은 뜻이 있는데 돌고 돌아 원을 이루 듯 처음과 끝이 수 없이 반복된다, 하루가 있으면 쌓아가 한 달이 된다, 해가 있으면 달이 존재한다는 등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한다.